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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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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역: 에세이
  • 연령: 일반
  • 구성: 336쪽 134*196mm
  • 배송: 단행본 2권이상 미국내 무료배송
  • 출판사: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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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U: 10112024991 Categories: , , , , ISBN: 9788930041683

Description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 버텨 내는 생로병사의 무게
시대의 눈물과 웃음을 포착한 성실한 글쓰기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_〈늙기의 즐거움〉, 7쪽

소설가 김훈이 산문 《허송세월》로 돌아왔다.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첫 문장에서 감지되듯 그는 죽음마저 일상적 루틴으로 여기는 ‘글 쓰는 실무형 노동자’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졌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바라보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그 오래고도 성실한 노동의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_〈재의 가벼움〉, 54쪽

노년에 접어든 후 술과 담배에 품게 된 애증의 감정을 털어놓은 서문 ‘늙기의 즐거움’을 지나쳐 1부 ‘새를 기다리며’를 펼쳐들면, 김훈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14편의 글이 기다린다. 심혈관 계통의 질환 때문에 그간 크게 아팠다고 고백하며 그는 말 그대로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하고, 몸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마침내 뼛가루가 되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지 고심한다.
이렇듯 입원실에 누워 오줌통에 소변이 고이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애환은 자연스럽게 생로병사의 무거움을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나마 버텨 내야 하는 중생의 고단함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일산 호수공원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노년의 나날을 보내는 그는 자신의 말이 이 고단함에서 벗어나 삶의 맨 얼굴에 닿기를 꿈꾼다. 그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허송세월에 바쁘다는 그가 2부 ‘글과 밥’에서 눈을 돌리는 곳은 다시금 “밥벌이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이다. 일찍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던 그에게 먹고사는 일의 애달픔을 정확히 포착하는 글쓰기는 평생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는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리고 필요한 말만을 부림으로써 언어를 삶의 한복판에 밀착시키고자 한다. 글 쓰는 이와 모국어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허약한 품사를 과감히 쳐 내고, 사물을 향해서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기 위함이다.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글이 잘나가서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 원고료가 많아지는 날이 위험하다. 이런 날 하루의 일을 마치고 공원에 놀러 나가기 전에 글 속에서 뜬 말들을 골라내고 기름기를 걷어 낼 때에는 남이 볼까 무섭다.”
_〈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143쪽

필요한 말만을 정확히 부리려는 노력은 삶의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박한 물건들에 애정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박물관에서 가야토기의 “어둡고 서늘”한 구멍을 들여다보며 그는 신라의 철제 무기에 스러져 간 가야 옹기장이들의 비애를 생각한다. 반면 생활 속 쓰레기가 일상의 연장이 되어 돌아온 똥바가지를 보면서는 “펄펄 살아 있던 활물”에 신명이 뻗치기도 한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한” 이 물건들에서 들려오는 듯한 “순하고 과장 없는” 단순한 말들이 그의 산문 언어가 향하는 지향점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나는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므로 우선 밥을 먹는 일에 관련된 유물들을 들여다보았는데, 너무 많아서 다 볼 수는 없었다. 절구, 맷돌, 항아리, 젓독, 김장독, 장독, 술독, 밥그릇, 국그릇, 주전자, 접시, 쟁반, 냄비, 뚝배기, 보시기, 탕깨(탕기)들이 끝이 없었다. 한없는 물건들은 제가끔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표정들의 일관된 질감은 사람의 일상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것들이 지니는 단순성과 현실성이었다.”
_〈박물관의 똥바가지〉, 179쪽

3부 ‘푸르른 날들’에 다다르면 작가는 시선을 더 멀리 두어 난세를 살았던, 또는 살고 있는 이들에게로 관심을 뻗친다. 다윈과 피츠로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의 청춘이 그의 문장에서 교차되며 떠오른다. 이러한 호명은 방정환, 임화, 최인훈, 박경리, 백낙청, 신경림…으로 이어진다.

“〈농무〉가 보여 주는 울분과 소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경림의 표정은 맑고 선하다. 눈을 맞고 있는 그의 얼굴은 천진성의 바탕을 보여 준다. 이 순간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본질을 보여 준다. 무엇을 기필코 보아야 한다는 의도가 없다. 물러서 있는 카메라가 그 순간을 보았다. 그 순간이 보였다. 이날 눈송이는 굵었다. 사진 속의 신경림은 아마도 눈이 내리는 것이 좋아서 웃고 있는 것 같다.”
_〈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 264쪽

서늘한 시대를 살면서도 푸른 날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근심과 희망이 남은 자리를 성실하게 더듬어 가던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지금 여기’의 중생고로 향한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끼여 죽고, 깔려 죽”었던 수많은 이웃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두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뿐이다.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말들로 들끓는 화세에, 말하기 어렵고 듣기 괴로운 세상에 몸서리치면서도 그의 문장은 꿋꿋이 나아간다.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듣기의 헛갈림은 시작됩니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의식 밑에 깔린 잠재욕망일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입니다. (…) 근거 없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자로는 화(譁)라고 씁니다. 온 세상에 말의 쓰레기들이 물 끓듯 들끓는 모습이 화비譁沸이고, 그런 세상의 이름은 화세(譁世)입니다.”
_〈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289쪽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의 투명 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 45편의 산문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에 포박되어 있던 가엾은 중생의 말에 바치는 송가다. 꽃과 새와 밥과 꿈에 뒤엉킨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애달프면서도 때로는 웃음기 있게,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낸 언어의 짜임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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